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편견 및 고정관념/역사 (문단 편집) ==== 고대 ==== * [[피라미드]]는 [[노예]]들을 채찍질하면서 지어졌다. * 문서 참조. 보통 일반 노동자들에 의해 지어졌으며 '''나름대로 괜찮은 직업이었다.''' 월급도 꼬박꼬박 받고, 휴가도 신청할 수 있고, 심지어 [[파업]]권(세계 최초로 파업이 기록된 사례이다), 무료 의료 서비스, 사후에 자기가 지은 피라미드 근처에 안장될 권리도 보장되었다. 피라미드에 가끔 노동자들의 낙서가 발견되는데 여기에서 이런 기록이 나온다. 노예에게 채찍질을 한 거라면 낙서가 존재할 수가 없다. 낙서를 하다 걸리면 더 많은 채찍을 맞았을 테니까. 심지어 채찍 역시도 노예를 패기 위해서가 아니라 채찍으로 구령을 맞추기 위함이라는 얘기도 있다. * [[하트셉수트]]는 백성이나 신하들이 자신을 깔볼까봐 [[남장]]을 했다. * [[파라오]]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다 갖춰야 하기 때문에 남장한 것이다. * [[예수]]는 실존인물이 아니다. * 현재 학계의 정설은 예수가 구세주 및 신의 아들이었나 등등을 떠나서, 역사적으로는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이다.[[예수/역사]] 참고. * 고대 [[갤리선]]은 노예들을 동원해서 노를 저었다. * 고대 갤리선의 노를 젓는 방식은 센 사일 방식이라 불리는 한 노에 1명씩 붙는 방식이라 노 젓다가 조금만 방심하면 노가 다 엉켜 난리법석이 일어남으로 갤리선의 노잡이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한 전문직이었고 때문에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철저하게 자유민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드물게 노예들을 사용할 때도 자유민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거나 약속 후 사용하였다.[* 아테네의 민주정도 해군덕에 발생하고 유지된 측면도 있는데 갤리선에 탑승한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고 이를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어서 민주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특권층들은 이를 못마땅해 했기에 해군에 비판적이었다.] 오히려 근세 이후로 스칼로치오 노 젓기 방식이 발명된 이후에 노예가 노 젓기 시작했고 이 경우에도 적어도 노하나당 한명의 자유민 숙련공이 필요했다. * [[고대 로마]] 시대 검투사들은 한번 싸울 때마다 [[데스매치|마지막 1명만 남고 모두가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웠다. 또는, 로마 시대 검투사들은 신분상 [[노예]]였다. * 초기의 경우 실제로 죽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유명 검투사의 경우 스타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인정만 받으면 자유민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마지막 1명만 남고 모두가 죽을 때까지'는 비슷한 사례가 있는게 콤모두스 황제는 검투사 두명이 머뭇거리자 열받아서 모든 검투사를 투입한 후 '''다 죽을때까지 싸우게 했다.''' * 노예 출신들도 있었지만 전쟁 포로나 범죄자들도 있었고, 나중에 인기가 좋아지면서부터는 일반인들도 서약하고 지원할 수 있었다. 귀족의 자제들도 심지어 황제도 검투 경기에 나가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콤모두스]] 황제의 경우. 사실 이 사람은 극렬 검투 경기 덕후라서 이런 짓을 자주 벌였다.]. * [[고대 로마|통일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러 노예 공급이 줄어들자 몸에 상처를 내는것으로 조건이 완화되기도 했다. * 로마 시대 기독교도들은 [[콜로세움]]에 설치된 기둥에 묶인 상태로 맹수들에게 뜯어 먹혀서 죽었다. * 1749년 [[교황]] [[베네딕토 14세]]가 콜로세움을 두고 "[[순교자]]의 성소" 로 선포하면서 발생한 오해.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역사적 근거는 전무하며 그 이전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콜로세움을 성소로 취급한 경우도 없었다. 영화 《[[쿼바디스]]》에서도 이런 장면이 그려져서 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당장에 현 콜로세움의 상태를 보면 성지로 삼았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 다만 [[사형]]의 의미로 기독교인들을 강제로 베스티아리(bestiari)[* 구경거리라는 의미도 있다.]가 되게 하여 맹수들과 싸우게 한 적은 많다. 이는 중범죄자들에 대한 처형의 성격을 갖고 있었으므로 당사자들은 갑옷이나 무장도 없이 방치되고 맹수들은 한도 끝도 없이 투입되었다. 이런 형벌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폐지되었다. * [[네로]] 황제는 콜로세움에서 검투사 경기를 즐겨 관람했다. * 네로 황제 재위 당시에는 콜로세움이 없었다. 당시 그곳에는 네로 거상이 있었고(…) 나중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그걸 밀어버리고 거기에 원형 경기장을 지은 뒤 그 이름을 "콜로세움" 이라고 한 것. * 검투사 경기에서 관중들은 패자를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다. 1693년판 번역본에 따르면, 유베날리스는 "엄지를 세워 뒤로 젖히면 패자를 죽인다" 고 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고전학자 존 메이어의 1853년판 번역본에는 엄지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면 찔러죽이라는 신호, 바닥을 가리키면 무기를 버려 살려주라는 신호였다" 고 나와 있다. 루이스와 쇼트가 쓴 라틴어사전(1880)의 "엄지" 항목을 보면 "오므리면 부정이고 펴면 긍정이다" 라고 쓰고 있다. *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먹고 토하고를 반복하기를 즐겼다. * 스타디움의 입구를 보미토리움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진짜 토하는 곳으로 와전된 것이다. * 로마의 귀족들도 일단은 사람이다. 먹고 토하길 반복하는 사치스러운 삶을 즐긴 사람이 없진 않으나, 그랬다간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으므로 사치를 자제하는 경향도 있었고[* 당장 [[로마 제국|로마 제정]] 초기부터 귀족이건 평민이건간에 사치부리는 자를 사회적으로 개망신을 주는 경향이 있었다. 초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가 놀고 먹기만 하는 자를 색출해서 싹 발가벗기고 [[조리돌림]]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들 중에는 [[원로원]]의 의원으로 재직하는 사람도 있던 만큼, 공무에 치여사느라고 [[YOLO|먹고 토하는 게 평생의 꿈]]인(...) 사람도 많았다. * [[18로 제후]]는 [[조조]]의 격문으로 전체가 참가했으나, [[화웅]]과 [[여포]]의 용맹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동을 못하고 [[유비]]군 혼자 분투하고, 조조가 [[서영(삼국지)|서영]]에게 패배하고, 동탁이 완전히 낙양성를 버리고 빈 낙양성를 먼저 차지한 [[손견]]이 [[옥새]]를 발견한다. * [[삼국지연의]]에서 창작된 것이다. 18로 제후는 전체 중 일부가 참가 안했고[* [[마등]]은 [[한수(삼국지)|한수]]의 난에 한수의 편에 들어가서 동탁 이하 급의 역적이고, [[공융]], [[도겸]], [[장양]], [[공손찬]]이 참가를 하지 않았다. 손견은 독립군벌이 아니라 [[원술]]의 소속으로 참가했다.] [[교모]]의 격문으로 일어났고, 적극적으로 활동 못한 이유가 [[동탁]]의 군세가 강하고, 제후 중의 한명인 [[한복(삼국지)|한복]]이 맹주인 [[원소(삼국지)|원소]]에게 군량을 안주어서[* 이일로 인해 한복은 동탁급의 평가를 받았다.] 적극적으로 활동을 못한다. 또한 연의와 달리 유비군은 이때 당시 화웅, 여포과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조조와 같이[* 영웅기 주석 출처] 서영에게 패퇴당하고 화웅, 여포는 이전에 서영에게 패퇴한 [[손견]]이 [[양인 전투]]에서 각각 화웅은 참했고,[* 여기서 이전 문서에서 편견의 오류가 있는데 손견이 화웅을 죽였다고 하지만 참했다는 기록은 '''직접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휘하가 베었다는 뜻이다.''' 자세히 한것은 [[일기토]] 문서 참고.] 여포는 패배를 당한다. 더불어 동탁도 손견에게 패배를 당해 손견자체가 무섭다고 말하고, 천도하고, 남아있던 [[여포]]가 손견에게 패배하고 낙양성를 내어주었다. 옥새는 원술이 차지했다. * [[헌제]]는 조비에게 반강제로 선양한뒤 그 직후 암살당했다. * 삼국시대(위, 촉, 오)를 배경으로 한 삼국지연의에서만 한정. 헌제는 [[제갈량]]과 태어난 해(181년)와 사망한 해(234년)가 동일하다. 또한 '''조비는 226년에 사망'''했으므로 헌제보다 '''8년이나 일찍 죽었다.''' 이같은 말은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이것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 [[흉노]]와 [[훈족]]은 동일한 민족이다. * 발음유사성에서 나온 주장일 뿐 흉노와 훈족의 관계는 확히 알려진 게 하나도 없다. 게다가 한나라의 이간질로 분열된 북흉노 남흉노도 서로 다르다시피하다. * [[포청천]]이 쓰는 [[작두]]들은 [[참수형|목을 치기 위함이다]]. * 오히려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의 도구로 쓰였다.--그게 더 무서운데?-- * [[예수]]는 생일은 [[12월 25일]]이다. * 실제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 로마시대에 당시 기독교인들이 태양신 축제에 대항해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 날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이라는 설이 있다. 이와 별개로 로마와 상관없는 켈트 교회, 동방교회등에선 독자적으로 크리스마스 날짜를 계산했으나, 4세기 무렵에는 율리우스력 12월 25일로 굳어졌다. 현대 정교회의 성탄절이 1월 7일이라고 하지만, 그 날짜는 율리우스력으로는 여전히 12월 25일이다. 그레고리력 반포 이후에는 서방교회가 그레고리력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념하다 보니 날짜가 달라졌을 뿐이다. 이미 복음서에 예수 탄생시 들판에 양 치는 목동들이 있었다고 하므로, 복음서의 설명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예수의 생일은 결코 겨울이 될 순 없으나, 당시 교회에서는 역사적 날짜가 언제인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무튼 이미 전통으로 굳었고, 상징적 날짜가 오히려 더 적절하다고 여겼다.[* 구판에서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그레고리력을 반포하며 성탄절 날짜를 확정했다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레고리오 16세]]는 그레고리력을 반포했을 뿐, 교회가 지키는 축일들이나 기념일들은 따로 건드리지 않았다. 단지 기준이 되는 달력이 율리우스력 대신 그레고리력이 되었을 뿐이다.] *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미개하고 제대로 된 문명을 갖춘 적이 한번도 없다 * 과거 유럽의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서 나온 편견[* 다만 이것은 서유럽에서 출발한 편견만은 아니며, 모로코인인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도 블랙아프리카 지역 문명을 깎아내리는 표현이 몇차례 등장한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말리 제국]], [[송가이 제국]], [[누비아]] 왕국, [[악숨 왕국]], [[짐바브웨]] 왕국, [[베냉|다호메이 왕국]][* [[그레이트 짐바브웨]]로 유명하다.], [[에티오피아]] 왕국처럼 나름대로 번성하고 어느정도 발달된 문명을 이룬 곳들도 많았다. 지금은 거의 다 망했지만... * 사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북아프리카]]나 [[유라시아]]에 비해 번성한 문명이 많이 없어 보이는 건, 북아프리카보다도 농사에 불리한 척박한 환경과, [[유럽]] 및 [[아시아]] 등의 타 대륙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들과의 교류가 별로 없었던 이유도 있다. 그나마 [[중동]] 지역과의 교류가 잦은 편이었던 [[동아프리카]]도 중동 이외의 [[아시아]] 지역과의 유의미한 접촉이 있었던 최초의 사례도 [[명나라]]의 [[정화]]가 이끄는 대함대와의 접촉이었고, 아랍, 베르베르 상인들과 접촉했던 일부 서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북부 일부 지역에 있었던 아가데즈 술탄국(지금의 니제르)들을 비롯한 투아레그 또는 베르베르족들이 세운 여러 나라들도 지금의 모로코와 모리타니를 비롯한 아랍계 또는 베르베르계 상인들과 교류하기도 했으며, 이게 [[15세기]]경에서나 있었던 일이다.[* 사실 그 이전에 현대 [[마다가스카르]]인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말라가시인의 조상인 [[인도네시아]] 지역의 [[말레이]]인들의 도래가 있었기는 하나, 그 뒤로 [[정화]]의 대원정이 있기까지 [[중동]] 이외의 [[아시아]] 지역에서 도래한 이들은 없었다.] 그러나 [[아시아]]와 접촉이 없었을 뿐, [[유럽]]이나 [[중동]]과의 접촉은 역사 내내 적지 않게 있어왔기 때문에 이는 올바른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한 이슬람 세력이 사하라 이남 지역까지 직접적으로 뻗어나갔기 때문에[* [[송가이 제국]]도 이슬람을 받이들였다. 오늘날 나이지리아 북부가 이슬람세가 강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구세계와 접촉이 없어서라는 것은 올바른 분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럽]]과의 접촉 역시 [[로마]]가 [[동아프리카]]지역과 접촉이 있었으며, 서아프리카 지역이 [[유럽]]과 접촉한 것은 [[아시아]]가 [[유럽]]과 접촉한 것보다 훨씬 이른 시기다.(거리상 당연한 일이다.) 또한 구세계와 접촉이 없이도 고도의 문자/천문/건축 수준을 확보한 [[메소아메리카]] 문명의 케이스도 있으며, 폴리네시아 문명과 미크로네시아 문명처럼(문명은 아니지만 일부 멜라네시아 제족들도 항해기술은 발달했었다) 항해 기술이 발달한 지역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